멜팅 아이스크림
melting icecream
(2021)

다큐멘터리│70분│DCP│흑백│16:9│5.1ch
언어: 한국어 | 자막: 영어

아카이브 영상 : 미디어참세상
(김용욱, 안창영, 이유림, 이혜리, 정용택, 조정민, 최은정)
아카이브 사진 : 민족사진연구회

연출, 편집 : 홍진훤
촬영 : 이승훈, 이민지
조명, 동시녹음 : 박기덕
사운드 디자인 : 홍초선
시각 디자인 : 신신
배급: (주)시네마달
후원: 서울특별시, 서울문화재단

CAST
박승화 - 민주화운동 당시 '민족사진연구회' 소속 사진가
서영걸 - 민주화운동 당시 '사진통신' 소속 사진가
이정용 - 민주화운동 당시 '사회사진연구소' 소속 사진가
임형주 - 사진 현상/인화/복원 전문가 이자 'color lab'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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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해를 입은 민주화운동 당시의 필름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종료될 수 없는 '민주화'의 완전한 승리를 선언하고 과거화, 역사화 하려는 욕망을 발견한다. 그것은 결국 영웅화,신화화의 결과를 낳았다. 민주화 운동의 영웅이었던 이들이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IMF, 정리해고, 비정규직으로 이어지는 신주유주의의 비극은 더욱 가속했다. 물론 그때도 그 지옥을 막기위해 싸웠던 사람들이 있었다. 싸우지 않을 도리가 없던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을 기록했던 사람들. 필름을 복원할 수록, 그 시대의 영웅들을 복원할 수록, 그 영웅들이 만든 세계와 싸웠던 사람들은 사라져갔다. 어떤 세계를 복원할 수록 삭제되는 어떤 세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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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회 부산평화영화제 평화상(대상) 수상
제14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아름다운 기러기상 수상
제36회 이미지포럼페스티벌 테라야마 슈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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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lting icecream
홍진훤

블라디보스토크, 러시아 혁명이 가장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 "태극기 부대 같은 사람들이에요." 러시아에서 나고 자란 그녀가 심드렁하게 말을 뱉었다. 혁명광장의 구석진 곳, 알 수 없는 구호를 외치며 신문을 나눠주던 사람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너무나 익숙한 문장이 적힌 신문을 집어 들었다. 화려한 백화점으로 둘러싸인 혁명광장에서 여전히 혁명을 그리며 소비에트의 복원을 꿈꾸는 사람들. 그녀는 소비에트의 기억에 대해, 그 영웅들의 지금에 대해 혐오에 가까운 문장들을 연신 뱉어댔다.

레닌과 트로츠키. 타틀린과 로드첸코. 그리고 막심 고리키. 한때 탐닉했던 그들의 광장에 서서 누군가에게 '태극기 부대'가 되어버린 그들을 다시 만났다. 혁명은 언제나 달콤하고 아름답지만, 혁명의 결말은 늘 눅눅하고 처참하다. 그것이 실패이든 성공이든. 중동과 아프리카. 동아시아 몇 나라의 혁명이 떠올랐다. 그리고 한국의 민주화 운동과 촛불 혁명이 떠올랐다. 혁명을 혁명이게 둘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생각했다. 승리를 선언하지 않는 혁명. 집어 든 신문을 만지작거리며 새똥으로 뒤덮인 혁명 전사 동상 주변을 한참이나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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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범벅이 된 사람들이 길거리를 나뒹굴고 있었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흥분한 경찰들은 곤봉과 방패로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해댔다. 조그만 모니터를 통해 목격한 장면은 이해할 수 없는 것들투성이였다. 정리해고에 반대하는 대우자동차 부평공장 노동자들과 그의 가족들이라고 했다. 그들이 왜 두들겨 맞고 있는지보다 더 궁금했던 것은 노벨평화상을 받은 인권운동가가 대통령인 나라에서 어떻게 이런 장면이 가능한가였다. 무엇인가를 이해하기에는 취임식에서 국민을 위해 눈물을 흘리던 그의 모습이 여전히 생생했다. 그때가 처음이었다. '민주'라는 단어에 의심을 품기 시작한 것이.

20년이 흘렀고 나는 한 남성의 이름을 기사를 통해 다시 만났다. 그는 영상에 등장했던 변호사였다. 폭력의 현장 한가운데서 몸을 내던져 노동자들과 함께 싸우던 사람. 그것은 마치 히어로물의 한 장면 같기도 했다. 확성기를 한 손에 들고 웃통을 벗은 채 경찰을 향해 고함을 치던 그 사람의 이름과 얼굴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20년 만에 다시 만난 그는 조금은 낯선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한 페미니스트 서울시장 후보 선거 벽보를 향해 '개시건방지다'라며 '찢어버리고 싶은 벽보'라고 글을 쓴 것이 기사화 된 것이었다. 언젠가부터 사람을 믿지 않기로 다짐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히어로'들은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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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면 경찰청 홈페이지 '오늘의 집회/시위' 페이지에 접속했다. 정확히 어떤 집회인지도 모른 채 무대 옆에 앉아 이야기를 듣다 돌아오곤 했다. 단호하고 처절한 말들이 매일 같이 반복됐다. 이해보다는 오해가 깊어지는 연극과도 같았다. 나는 연극의 유일한 관객이자 집회의 유일한 구경꾼이었다. 어떤 집회는 위험했다. 경찰과 시위대는 누구도 물러설 수 없다는 듯이 몸을 던져 싸웠다. 각종 무기가 등장했고 부상자가 속출했다. 물론 대부분이 이내 시위대의 패배로 끝나는 싸움이었지만 반복되는 충돌은 관객에게 충분한 위험이었다. 적당한 안전과 적당한 위험의 상태를 지키며 집회를 구경할 수 있는 도구가 필요했다. 그때부터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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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목소리를 처음 들은 것은 한진중공업 김주익 지회장이 크레인 위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직후였다. 유난히 화질이 좋지 않던 추모식 영상을 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민주노조 하지 말 걸 그랬습니다."라며 울부짖는 장면에서 갑자기 주체할 수 없는 울음이 터져 나왔다. 김주익도, 김진숙도 모르던 내가 왜 그렇게 무너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노예가 품었던 인간의 꿈"이라는 구절은 그녀의 목소리와 함께 또렷이 기억에 남았다. 김주익이 파업으로 구속됐을때 변호를 맡았던 인권변호사 노무현이 대통령인 나라에서 처음으로 세상에 대한 분노 비슷한 것이 생기기 시작했다. 85호 크레인이라고 했다. 김주익이 죽었던 그 크레인에 김진숙이 다시 올랐다고 했다. 8년 만에 그녀를 다시 만났다. 영도의 하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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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집회를 어슬렁거리며 쭈뼛거리던 나에게 몰래 촬영 비표를 챙겨주던 그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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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이라는 단어도 낯설었던 시절, '비정규노동자대회'라는 생소한 이름의 집회가 대학로에서 열린다고 했다. 여느 때와 같이 카메라를 들고 무대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집회를 구경했다. 어디선가 짧은 비명이 몇 번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사람들 위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근로복지공단에서 일하는 이용석이라는 사람이라고 했다. 또 한 명의 노동자가 죽었다. '비정규직을 철폐하라'고 외치며. 도망치듯 집회장을 빠져나왔다. 처음으로 사람 타는 냄새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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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저녁 챙겨보던 언론은 '민중언론 참세상'이라는 곳이었다. 이름도 운동권스러운 그곳의 로고에는 붉은 별이 그려져 있었다. 수시로 업데이트되는 투쟁 영상들을 확인하며 지옥을 감각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이곳의 모든 콘텐츠는 COPYLEFT 정책을 따르고 있었다. 돈도 안 되는 이 영상들을 이렇게도 성실하게 생산해내는 사람들이 늘 궁금했다. 어느 날부터 모든 영상이 재생되지 않았다. 언젠가 이렇게 될 것이라 예상했지만 막상 이렇게 되고 보니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내가 신뢰했던 어떤 세계 하나가 통째로 사라진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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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블 TV의 채널 256번은 24시간 혁명광장의 모습을 생중계하고 있었다. 숙소에 누워서 TV를 통해 혁명광장을 지켜보았다. 수많은 관광객이 기념사진을 찍고 흩어지기를 반복한다. 관광객들이 이동할 때 마다 관광객이 던져주는 과자부스러기를 먹기 위해 거대한 비둘기 떼가 함께 이동한다. 시간이 흘러 해가 저물면 젊은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맥주를 마시기도 하고 그마저도 사라진 깊은 밤이 되면 어디선가 나타난 노숙인이 벤치에 누워 잠을 청한다. 매일 아침 같은 시간 광장을 걷는 노인이 있고 때가 되면 어딘가를 향해 절을 하는 무슬림 이주노동자들이 있다. 하루종일 침대에 누워 광장을 훔쳐보는 일은 생각보다 지루하지 않았다. 서울에서도 늘 하던 일이었으니까. 꽤나 익숙한 거리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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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열렬한 노무현의 지지자였다. 선거가 다가오자 한 표를 더 얻기 위해 끊임없이 나를 설득했다. 왜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지. 노무현이 대통령인 나라는 어떻게 다를 것인지. 하지만 단 한 번도 그의 주장에 동조해주지 못했다. 김대중이 대통령인 나라에 살아보았으니까. 그가 누구든 대통령이라는 직업은 세상을 바꾸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니까. 그리고 나는 사람을, 영웅을 믿지 않으니까. 노무현이 당선되던 날 밤 축하한다는 문자를 보내려다 그만두었다. 그 축하를 언젠가는 후회할 것 같아서.

분명 기대가 있었다. 어쩔 수 없이 기대가 생겼다. 노무현이 대통령인 나라에. 참여정부의 노동 탄압에 노동자들이 연이어 죽어 나가도 그 기대를 쉽게 거두지는 못했다. 그런데 그가 "분신을 투쟁수단으로 삼는 시대는 지났다"고 말했을 때. 역시 축하 문자를 보내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기대를 남김없이 지워냈다. 시인 김지하가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며 호통을 치던 모습이 이랬을까. 노동자들을 향해 "자살로 인해 목적이 달성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말했던 그가 봉화산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때 나를 그렇게 설득했던 그가 생각났다.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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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보호법이 상임위를 통과하던 날. 장대비가 내리는 국회 앞 길거리에 주저앉아 목놓아 울고 있는 그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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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림, 이상관, 박용순, 최옥란, 박봉규, 천덕명, 배달호, 박상준, 송석찬, 이현중, 이경해, 박동준, 김주익, 이용석, 곽재규, 성기득, 박일수, 장상국, 김춘봉, 김태환, 류기혁, 김동윤, 오추옥, 전용철, 홍덕표, 하중근, 남문수, 전응재, 허세욱, 이근재, 정해진. 너무 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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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종로구 창신동. 오랜 연을 두고 살아온 동네에 전태일 재단이 생겼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 동네 살면서 재단의 회원 정도는 되는 것이 좋겠다 싶어 매달 약간의 돈을 보내기로 했다. 어느 날 이해하기 힘든 제목의 영상을 하나 발견했다. "전태일 재단에 항거하는 전태삼" 영상에는 전태일 49주기 추도식에서 진행된 전태일의 동생 전태삼씨의 길지 않은 발언이 담겨있었다. 형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하던 동생은 갑자기 전태일 재단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재단이 노동자의 역사를 부정하고 있고 폄하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그때 한 남성이 큰 걸음으로 걸어 나와 연설하던 마이크를 뺏어 집어던지더니 누군가 전태삼씨를 들어 무대 밖으로 끌어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추도식이 진행되었다. 사실 이런저런 재단과 기념관을 둘러싼 꽤나 익숙한 풍경이었다. 조금 서글펐던 것은 그곳이 전태일의 무덤 앞이었다는 것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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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중공업 노동조합에 대한 이야기를 지겹도록 들어왔다. 87년 노동자 대투쟁과 89년 128일 파업. 노동자 계급의 영웅적인 투쟁. 언젠가 한 번은 그곳에 가보고 싶었다. 울산에 도착하자 이미 수많은 만장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다. 분신한 지 56일 만에 치르는 현대중공업 하청노동자 박일수의 장례였다. 울산에 가기로 마음먹었던 것은 그의 유서를 읽고 나서였다. "현대어용 노동조합은 그네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노동조합이고 노동자는 하나다는 원칙은 말장난일 뿐 열악한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는 안중에도 없다." 이런 식으로 오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돌아돌아 결국 현대중공업 공장 앞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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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 아무생각 없는 나를 붙잡고 사회주의에 관해 이야기 하던, 혁명에 관해 이야기 하던 사람들이 참 신기했고 좋았다. 그들은 이내 대기업에 취직하거나 공무원이 되거나 스타트업 기업의 대표가 되었다. 하지만 고맙게도 나는 결국 아무것도 되지 못했다.

<멜팅 아이스크림 (melting icecream)> 다큐멘터리, 70분, DCP, 흑백, 16:9, 5.1ch
<멜팅 아이스크림 (melting icecream)> 다큐멘터리, 70분, DCP, 흑백, 16:9, 5.1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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