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밝고, 아직은 어두운
Still light, Yet dark
(2023)

2023년 제9회 대구사진비엔날레
영 아티스트 사진전

<여전히 밝고, 아직은 어두운>
<Still light, Yet dark>

2023.10.05. - 11.02
경북대학교 미술관 제1,2전시실

참여작가: 민영영, 박금비, 양지훈, 정현민, 현다혜
기획: 홍진훤
코디네이터: 박기덕
그래픽 디자인: 물질과 비물질
전시전경 촬영: 박기덕

주최: 대구광역시
주관: 대구문화예술진흥원(대구문화예술회관)
협력: 경북대학교 미술관


기획의 글

여전히 밝고, 아직은 어두운

2023년 제9회 대구사진비엔날레 영-아티스트 사진전 <여전히 밝고, 아직은 어두운>은 본 비엔날레가 탐구하고 있는 사진 매체만의 고유한 특성과 ‘사진적인 사진’을 동시대적으로 해석하고 확장해 보고자 한다. ‘사진적’이라는 형용의 동시대적 의미와 ‘사진’이라는 매체의 경계를 질문하고 그 고민의 결과를 전시의 형태로 제안한다. 이를 위해 다섯 명의 작가는 5개월 동안 함께 워크숍을 진행하며 논의의 결과를 토대로 작업을 이어 나간다. 이런 공동의 작업 과정은 사진의 규정은 더 이상 선언의 형태가 아닌 질문의 형태임을 인정하고 모호하고 유동적인 사진의 상태를 함께 짐작해 나가보기 위한 방법론이다.

최근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진 콘테스트에서 인공지능이 생성한 이미지가 우승을 차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출품자는 동시대 사진에 관한 열린 논의가 필요하다는 취지의 말을 남기며 수상을 거부했고, 주최 측은 해당 이미지를 콘테스트 사이트에서 삭제하는 것으로 사건을 일단락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인공지능 기술에 엄청난 투자를 하고 있는 기업이 주최한 콘테스트라는 점에서 모두에게 더 큰 의미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이 사건이 남긴 일종의 찝찝함에서 이 전시의 주된 질문들을 시작해 보려고 한다.

우선 이 사건으로 직면한 가장 큰 절망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좋은’ 사진, 혹은 ‘잘 찍은’ 사진이라는 미학적 기준이 이미 기존 사진의 분석과 조합만으로도 포획 가능한 범주에 머무르고 있다는 현실이다. 동시대 사진의 예술적 성취가 이런 관성 안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마주하게 되면 지금 사진예술이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의심이 피어오를 수밖에 없다. 우리는 그 무엇보다 이 사진-관성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지 오래 질문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이 문제의 사진이 동시대 사진에 관한 의문의 실마리들을 어렴풋하게나마 던져준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런 것들이다. 당연하게도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카메라가 필요하다. 그것이 카메라 옵스큐라이든, 필름 카메라이든, 디지털 카메라이든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카메라가 필요하다. 심지어 포토그램조차도 카메라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시공간적 장치가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이 사진에는 카메라라고 할만한 것을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 사진은 그 무엇도 재현하지 않고 아무것도 가리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진의 본질이라고 믿었던 재현성과 지표성이라는 개념이 단숨에 폐기되는 듯 보인다.

이 문제를 가장 쉽게 해결하는 방법은 그것은 사진이 아니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애잔한 선언은 분명 우리를 더 찝찝하게 만든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촬영된 수많은 사진을 학습해 가장 인간적이고 사진적인 형태로 생성되어 재현의 재현으로 우리 눈앞에 존재하는 이것. 심사위원들에게도 의심할 여지 없이 사진으로 인식되는 이것. 이것을 정말 카메라로 찍은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것이 정말 아무것도 재현하지 않고 아무것도 가리키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미 대부분의 사진이 알고리즘의 판단 아래 작은 액정 화면을 기반으로 유통-소비된다. 사진을 사진으로 인식-규정할 수 있는 권력조차 박탈당한 이 상황에서 우리는 “그래, 그럼 이것도 사진이라고 하자”라고 넘어가면 되는 일일까?

기술에 역진은 없다. 특히나 사진은 기술 의존적인 매체여서 기술 환경의 변화에 따라 스스로를 변화-적응해왔다. 좋든 싫든 우리는 한동안 더욱 생생한 생성-사진들과 함께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것이 사진인가 아닌가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것이 사진일 수 있는 이유와 사진일 수 없는 이유를 탐구하는 일이다. 나아가 사진을 둘러싼 배타적 조건들이 중첩의 상태로 존재할 가능성을 상상하고 사진 생산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재인식하는 일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또한 모든 기술은 당대의 정치-경제적 관계 안에서 발명-발견된다는 역사적 사실을 염두에 두며 동시대 기술이 추동하는 시각 세계를 의심하고 이에 포획되지 않는 사진예술의 가능성을 찾는 일 역시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할 일이 많다. 하지만 이 전시는 답을 향해 질주하지 않는다. 우리의 무수한 의심과 질문들이 지금의 사진 그 자체라고 믿기 때문이다. 양자의 세계를 처음 접했을 때의 허탈함과 어지러움을 다시 떠올려 보자. 모든 것이 정해지지 않은 상태로 정해져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 전전긍긍하던 때 말이다. 이미 가상은 과잉 현실이며 현실은 과잉 가상이다. 가상과 현실의 중첩 상태로만 지금을 인식할 수 있다면 그것을 구분하려는 시도는 헛헛하기만 하다. 사진도 마찬가지 처지에 있다. 우리가 지금의 사진을 이해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성실하게 질문하며 의심을 축적하는 것뿐이다.

이 지난한 여정을 함께한 다섯 명의 작가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기성의 사진들과 불화하며 지금 우리가 고민해야 할 사진의 경계를 가시화한다. 그들이 다루는 대상은 인공지능 알고리즘, 불펌 영상, 산불, 전쟁, 사진작가, 무당, 여성 노동자 등 좀처럼 하나로 수렴되지 않는다. 하지만 오랫동안 쌓아 올린 이 의심의 더미들이 상상 가능한 사진의 영역을 조금 더 넓히려는 노력이었음은 동일하다.

박금비는 <덤>과 <풀풀>이라는 두 작업을 통해 이미지를 둘러싼 인공지능 알고리즘의 역사가 사실은 지금까지 사진이 해온 일과 다를 바 없음을 폭로한다. 이를 통해 사진을 둘러싼 기계-화학-광학의 역사가 어떻게 동시대에 전혀 다른 모습으로, 하지만 같은 욕망으로 작동하는지 말한다. <풀풀>은 새소리를 학습하는 알고리즘의 구조를 따라가며 소리가 어떻게 이미지가 되고 이미지는 무엇을 기준으로 ‘진짜’와 ‘가짜’ 이미지로 판명되는지 그 무용한 과정을 담고 있다. <덤>은 ‘홈 스타일링’이라는 새로운 문화를 통해 상품 자본주의가 어떻게 사진을 통제했는지 확인하며 그 과정에서 강제된 각종 사진술과 알고리즘 추적한다. 그리고 그 결과로 검은 구멍이 되어버린 인간이라는 객체를 탐구한다.

양지훈은 <dox>라는 작업에서 각종 플랫폼을 가득 채운 불펌영상들의 형식과 내용을 분석하며 이제는 불펌영상이 갖고 있는 시각적 형식만으로도 말초적 자극을 생산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주장한다. 작가가 가장 집중하는 형식은 삼각형 필러 박스이다. 화면과 영상의 비율 차이로 생기는 이 검은 박스가 불펌을 위해 삼각형이 되었고 결국 이 검은 삼각형이 스스로 하나의 서사가 되고 이미지가 되었다고 선언한다. 또 다른 작업 <테이큰>은 인왕산 산불을 둘러싼 작가의 경험을 토대로 소셜미디어를 위한 피사체로 존재하는 비극의 풍경들에 관해 이야기한다. 사진이 된 비극은 전혀 다른 비극의 모습으로 환생하고 또 다른 비극을 생산하는 지경에 이른다.

정현민은 <사진, 사진, 사진, 사진, 사진, 사진에 대하여>라는 짜증섞인 제목의 작업 안에서 전업 사진가들과 긴 대화를 이어간다. 이 짧지 않은 대화는 사진에 관한 의심으로 가득 차 있다. 한 장의 사진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함께 좇으며 결국 우리가 믿어온 ‘좋은 사진’이라는 것은 어떤 사진과 적극적으로 닮아가는 과정에 있음을 인지하게 되고 그것은 일종의 이미지-평균값을 찾아가는 과정임을 폭로한다. 그 결과 ‘좋은 사진’은 언제나 예측 가능한 상태에 놓이게 되고 이미지 생성 알고리즘의 수치적 토대로만 작동하게 되었다. 사진에 대한 의심에 잠식된 작가는 자신이 지금껏 해온 일들을 반추하며 도대체 사진이 무엇인지 끝없이 회의한다.

민영영과 현다혜는 지금까지 가장 관성적 사진으로 재현되어 온 대상으로 무당과 여성 노동자를 지목한다. 민영영은 <부채 방울을 흔들어 본 적은 없는데, 지갑에 부적은 있다>라는 긴 제목의 작업을 통해 본인의 엄마이자 무당인 대상을 지속적으로 관찰하고 기억을 복기하며 자신의 규칙에 따라 사진을 찍고 모으고 찢고 포갠다. 다소 수행적이기까지한 이 과정은 이 세상과 분리된채 타자로만 존재하던 전통적 무당-사진에 대한 부정이자 저항인 동시에 누군가의 딸이자 아내이고 어머니인 한 무당의 실체적 형상을 어떻게든 드러내보려는 제의적 실천에 가깝다.

현다혜는 주로 피해자 혹은 영웅의 위치에서 재현되어 온 여성 공장노동자들의 사진에 관심과 의심이 있다. <캡핑>이라는 작업은 이 의심을 기반으로 야간의 공장에서 일하는 중년 여성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작가는 공장에서 일하는 엄마의 직업을 속여야 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언제나 숨겨져야 했던 ‘말 못 했던’ 이미지에 관해 말하기를 시작한다. 검은 밤에만 드러나는 작업복의 그녀들을 기록하며 반성과 위로를 담아 연대의 손을 내민다. 또 다른 작업 <칸들>은 ‘나미노우에’라는 배를 기록한 연작이다. 세월호와 같은 모습의 배를 타고 이곳과 저곳 사이의 여백을 지켜보며 절대적 부재 앞에서 무력한 사진의 위치를 확인한다. 하지만 이 두 작업은 서로 다른 이유로 삭제된 어떤 풍경을 기필코 다시 소환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진에 대한 기대를 놓지 못한다.

이처럼 작가들의 고민은 방향성 없이 떠돌지만, 그들의 작업이 동일하게 가리키는 것은 사진은 한 번도 고정되어 본 적 없는 끝없이 극복되고 갱신되어야 할 무엇임을 잊지 않고자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전시가 본 비엔날레의 슬로건처럼 ‘다시, 사진으로!’ 돌아가 보는 이유는 동시대 사진의 정체를 밝히기 위함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불확정적으로 유동하는 사진의 상태를 인정하고 그 가능성을 상상해 보기 위함이다. 이 부질없어 보이는 시도가 중요한 이유는 지금의 사진을 이해하는 일과 지금의 세계를 이해하는 일이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