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CTOBER
(2017)
오프닝: 2017년 12월 8일 (금) 오후 6시
전시장소: 아르코미술관 제2전시실
참여작가: 강태훈, 물질과비물질, 서평주, 손혜경, 연구모임 아래, 양유연, 이덕형+조주연, 이상엽, 이우성, 홍진훤
전시기획: 신양희
디자인: 배지선
공간디자인: 비유유피
주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러시아혁명의 현재성과 우리 인민의 잠재성
이 전시는 지금의 현실을 그대로 인정할 수 없다는, 또한 변화할 수 있다고 믿는 열망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에 100년 전 러시아에서 일어났던 러시아혁명에 주목하면서도 한국사회의 계급투쟁을 주제로 하여 ‘러시아혁명의 현재성’과 ‘우리인민의 잠재성’이라는 두 섹션을 개념적으로 분리하였지만, 전시를 통해서는 두 섹션의 결합을 시도한다. 따라서 개념적으로 분리된 두 가지 미션은 전시장에서는 하나의 목소리를 만들고자 했으며, 전시가 지향하는 이념의 방향성을 맞추고자 시도했다. 1섹션 <러시아혁명의 현재성>은 러시아혁명을 이끌었던 주체들에 대한 시각적, 조형적 탐구, 혁명 전후의 미술에 대한 연구, 혁명이 사라진 후의 풍경, 혁명이 한국사회에 미친 영향 등 당대적인 주제를 탐구하면서도 이를 현재화하는 작업으로, 강태훈, 물질과비물질, 연구모임아래, 이덕형+조주연, 이상엽이 참여한다. 2섹션 <우리인민의 잠재성>은 한국사회에서 계급투쟁을 이끌었던 주체들에 대한 역사적이고, 당대적인 고찰로 서평주, 손혜경, 양유연, 이우성, 홍진훤이 참여한다.
사회는 아주 오랜 시간 그대로 멈춰 있기도 하고, 때로 조금씩 변화하기도 하는데, 더 이상 그 체제가 유지될 수 없는 한계 지점이 오면 다른 사회로 이행한다. 인류의 긴 역사는 몇 번의 생산양식의 변화를 거치면서 다른 세계로 이행했다. 특히 근대 자본주의가 시작된 이래 인류의 역사를 빠르게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자본주의가 인류의 진보를 앞당긴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러한 과정이 참혹했다는 것도 이에 못지않은 중요한 사실이다. 자본주의의 지양이 사회주의이지만 그것을 현실화하는 것이 참으로 쉽지는 않다는 것을 역사는 말해준다. 하지만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유토피아와 같은 것이 아니라 실은 인류의 역사에 내재된 것이며, 그것은 필연적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이기도 하다. 비록 지금은 존속하지 않지만 100년 전 인류의 한 사회는 사회주의 혁명을 관철했다. 러시아혁명이라 명명되는 이 사건은 인류에 내재되어 있던 본성을 끄집어낸 사건이었다. 한편으로 러시아혁명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이전의 유럽의 여러 혁명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에서 부르주아 혁명과 사회주의 혁명의 관계를 짐작해 볼 수도 있다.
이 전시는 러시아혁명 이후 전개된 러시아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의 공과를 따지고자 하지는 않는다. 다만 러시아혁명이 어떤 모습으로 드러났고, 어떤 이념과 이상을 보여주었는지에 주목하고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에 더 방점을 두고자 한다. 따라서 러시아혁명의 의의를 밝히면서도 그것을 우리의 현실과 밀접하게 결합시키는 작업이 쉬운 일은 아니다. 여러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사회주의혁명을 이룩했던 러시아의 상황과, 자본주의라는 생산양식의 변혁보다는 민주주의를 성취하기 위해 달려온 우리의 역사는 다를 수밖에 없다. 또한 100년 전의 인민들에게 놓인 과제와 현재 우리 인민에게 놓인 과제 또한 다르다. 그렇지만 이 전시는 지배/피지배의 계급관계에서 발생하는 계급적대와 계급투쟁이 한편에서는 혁명을 성취하는 모습으로, 다른 한편에서는 잠재된 모습을 가진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를 혁명의 성취냐 아니냐의 차별적인 시각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지배/피지배 관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이상이 어느 시대에나 작동한다는 동일성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통해서 현재 우리는 어떤 시대와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는지를 러시아혁명과 더불어서 좀 더 선명하게 바라보고자 하는 것이다.
지난해 10월 말 박근혜 정권의 국정농단으로 시작된 광장의 촛불은 그를 대통령의 자리에서 끌어내렸을 뿐만 아니라 ‘적폐청산’이라는 국민적 의지를 만들었다. 국민들이 촛불을 들고 정치세력을 앞질렀던 것은 뜨거운 열정뿐만 아니라 이성과 합리, 지성과 상식을 보유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정치세력 일반과 국민 사이의 권력 투쟁은 결국 이 사회에 은폐되어 있던 계급적대를 드러낸 것이었다. 이는 여전히 국가와 정치, 사회를 변화시킬 주체로서 인민들의 진보적인 의의를 말해준다. 사실 이러한 국민적인 투쟁 또한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다. 이 또한 한국 근현대사를 따져봄으로써 의의를 부여할 수 있다. 분단과 냉전, 산업 근대화라는 엄혹한 시대에서 피지배계급에 대한 지배계급의 수탈과 억압이 가혹했지만 피지배계급의 저항과 투쟁이 한 번도 사라진 적은 없었다. 그리고 민주주의라는 이상을 위해서 수많은 투쟁과 죽음이 있었다는 사실 또한 한국의 근현대사는 말해준다.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에 근거를 두고 피지배계급의 저항과 한국사회의 계급투쟁이 이 전시의 논의 대상이 되었으며, 우리 운동의 의의뿐만 아니라 한계까지도 전시의 주제로 삼고자 했다.
이처럼 <옥토버>는 시대와 상황은 다르지만, 지배와 피지배의 사회에서 계급적대와 계급투쟁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하며, 더 나은 사회와 체제를 이성적으로 열망하고 희망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사회의 진보적인 힘에 대해 예술언어는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담아내고자 한다. 현실의 문제를 온몸으로 감각하면서 그것을 예술이라는 이름 아래 이성적으로 표현했던 시대도 분명히 있었다. 물론 그들 당대에 실현하지 못했다손 치더라도 역사와 후대는 그들을 버리지 않는다. 명확한 현실 인식 아래 의식적인 운동으로서의 예술, 사회의 모순을 끝까지 밀고 나간 예술이 매 시대마다 존재하기는 어렵지만, 그럼에도 그러한 모험이 없다면 예술이 가진 역사적 상상력과 잠재성이 드러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 전시는 예술이 다른 사회를 향한 이상과 비전을 떠안아 볼 수 있다는 시도이자 인민들의 건강함과 투명함이 역사, 진보, 이성이라는 이름으로 빛날 수 있기를 소망하는 전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