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처음의 처음시간
The very first time
(2014-2015)

밤이 오지 않는다. 여름 러시아의 백야(白夜)에 대해 들은적은 있었지만 밤이 오지 않는 밤은 꽤나 낯설은 경험이다. 낮은 밝고 밤은 어둡다는 어리석은 확고함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결국은 낮/밤의 구분이 허망해 지고 시간의 분절이 덧없어 지는 밝은 밤이다. 지구의 자전축이 조금 기울어졌다는 단순한 과학적 사실이 낮과 밤이라는 거대한 서사를 혼란시킨다는 것은 참 측은한 진실이다.

3천만년이라는 시간이 쌓여진 바이칼 호수 앞에서 오늘과 내일은 같은 날이다. 그 앞에 선 인간의 평생이라는 것이 얼마나 초라한 것인지를 간파한 사람들은 자연스레 그 곳을 샤머니즘의 성지로 만들었을 것이다. 브리야트 샤먼들의 노래에서 바이칼은 “가장 처음의 처음시간”이라고 표현된다. 아직도 그 샤먼의 형식들을 삶으로 지켜가며 살아가는 그곳 사람들에게 성스러움은 아마도 시간 그 자체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밤이라 할만한 시간이 오면 무수한 별들에 눈이 가지 않을 수 없다. 저 빛은 또 얼마나 오랜 시간을 쌓고 있는가. 우리가 가늠할 수도 없는 아주 먼 과거에서 출발한 그 빛을 지금, 여기에서 내가 보고 있다. 한 공간에 무수한 시간이 혼재한다. 사진이라는 것이 시간이라는 물질을 붙잡아보려는 인간의 욕망이라면 그것의 처참한 실패를 맞보는 곳이 바로 여기가 아닐까 싶다.

<2014 바이칼 노마딕 레지던시 프로그램>, 한국문화예술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