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감 없는 현장의 웅변
유운성
(2022)

현장감 없는 현장의 웅변
유운성(영화평론가, 영상비편 전문지 『오큘로』 공동발행인)

누구보다 현장감 있는 문체를 구사하는 날렵한 필력의 소설가라 해도 현장 자체를 소설에 끌어들일 수는 없다. 특정한 장소에서 그야말로 일순간에 벌어진 사건이라 해도 소설적 묘사는 이를 언어적 공간에서 순차적으로 풀어내기 마련이라 현장의 섬광은 말들 사이에서 사그라들기 일쑤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우리에게 이 소설가는 다음과 같이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당신이 그처럼 말의 힘을 낮잡아 보는 것은 현장이란 시간성, 보다 구체적으로는 사건적 요소들의 동시성과 결부된 것이라고 가정하기 때문은 아닌가요? 잠시 생각한 후에, 우리는 대답한다. 꼭 그렇다고는 할 수 없어요. 그림은 사건을 묘사할 때 그것을 이루는 요소들을 한꺼번에 동시적으로 볼 수 있게 해 주지만 아무리 현장감 있는 그림이라 해도 거기에 현장은 존재하지 않거든요. 이때, 소설가와 화가는 뭔가 알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서로의 시선을 교환하더니 돌연 손가락으로 우리를 가리키며 거의 동시에 외친다. 듣자 하니 당신은 사진 아니면 영화 하는 사람이겠군요! 모욕의 현장.

오늘날에는 이런 현장을 가정하는 일 자체가 비현실적으로 다가온다. 문학과 회화의 공간에서 현장감이 문제시되던 시절은 오래전에 지나갔다. 한때 현장에 깊숙이 연루되기도 했던 사진과 영화의 다큐멘터리즘은 이제 더는 거기에 연연하지 않는다. 두 명의 엄지동자가 쉬지 않고 춤추며 끄집어내는 문자와 이모티콘들이 시시각각 점멸하는 스마트폰 디스플레이 화면만큼이나 박진감 넘치는 현장도 없다. 저런, 당신은 지나치게 성급하고 냉소적인 사람이군요! 우리 등 뒤에서 우리와는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던 누군가가 외친다. 암암리에 당신은 현장감을 현장의 속성이라고 가정하고 있어요. 자신도 모르게 언어의 기만에 말려든 거죠. 그런데 우리는 정작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현장에 있을 때는 절대 현장감 있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아요. 차라리 “정말 영화 같은데!”라고 말하겠죠. 현장감 있는 현장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요. 현장감은 사건적 장소를 과거화하는 표현에 불과해요. ‘현장감’이라는 말은 현장인 곳을 결국 현장이었던 곳으로 만들어 버려요. 하지만 그러면 안 되지 않나요? 현장은 무엇보다 사건적 장소를 현재화하는 것이어야 하지 않나요? 천천히 돌아서서, 우리는 묻는다. 당신은 그런 현장을 본 적이 있나요?

최근 내게 홍진훤 작가와 대담을 할 기회가 주어져 한국영상자료원에서 한 시간 남짓 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사진작가이자 기획자로 여러 다양한 활동을 해 온 그가 최근에 내놓은 70분짜리 영상 작품 〈멜팅 아이스크림〉의 상영이 끝난 다음이었다. (기억력이 좋은 독자라면 이쯤에서 “아니, 이건 약속과 다르지 않나요?”라며 항의할 수도 있다. 이 연재를 시작할 때 “우리는 영화와 관련해서라면 작가의 이름도, 심지어 작품의 제목도 일절 언급하지 않으면서 이야기하려 한다”고 했던 것을 떠올렸다면 말이다. 이에 대한 변명은 다음과 같다. 여기서 나는 홍진훤을 영화감독이 아니라 사진작가로, 〈멜팅 아이스크림〉을 영화가 아니라 사진적 감각의 몽타주를 모색하는 영상 작품으로 간주한다. 또한, 이처럼 사진적인 것을 경유해 영화의 장소들에 관해 고찰하는 동안에는 잠시 ‘우리’라는 복수형을 물리고 ‘나’로서 말하고자 한다.)

〈멜팅 아이스크림〉은 사진작가이자 시인인 박용수(1934~2022)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기증한 사료들 가운데 과거에 있었던 여러 항쟁의 기록이 담겨 있을 것으로 추정되나 심하게 수해를 입은 필름들이 발견되면서 시작된 작업이다. 박용수의 아들로 민족사진연구회 회원이었던 박승화는 이 필름들에 1990~1992년의 범민족대회, 1991년의 강경대 장례식과 옥포조선소 파업 등을 찍은 ‘A컷’들이 있으리라 기대했다. 이 작업은 수해를 입은 필름의 복원 과정을 기록하기 위해 시작된 것이지만 완성된 결과물은 단순한 기록물의 성격을 훌쩍 벗어나 있다.

복원 과정에 대한 묘사와 더불어 이른바 민주화 세대에 속하는 사진작가들과의 인터뷰가 작품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데, 박승화를 비롯해 사회사진연구소 출신의 이정용, 그리고 서영걸 등이 등장한다. 이들의 증언은 대략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에 걸친 시기와 관련되어 있다. 이 시간은 많은 이들에 의해 기억되고 기념되는 시간이고 심하게 훼손되었더라도 어떻게든 복원되는 시간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 시간은 기념되어야만 하고 복원되어야만 한다는 윤리적 당위로 보호받는 특권적 시간이다.

홍진훤은 이처럼 특권화된 시간에 의문을 표하고 거기에 균열을 내기 위해 또 하나의 축을 도입한다. 〈미디어 참세상〉이 수집해 웹사이트에 게시했던 아카이브 영상들이 그것으로, 이 영상들에는 민주화 이후 2000년대의 김대중, 노무현 정권에서 벌어졌던 비정규직 투쟁 및 이주 노동자 투쟁의 광경들이 담겨 있다. 그런데 이 영상들과 관련된 시기의 증언자들은 나오지 않는다. 심지어 이 영상들은 유지 관리의 어려움과 비용 문제로 현재는 온라인에서 모두 사라진 상태다. 첫 번째 축이 가리키는 시간, 대과거라고 할 수 있는 시간보다 현재 가까이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간은 그것에 힘을 실을 지금 이곳의 증언자 없이 스스로를 표명한다. 항쟁의 시간과 투쟁의 시간은 차별화된다. 투쟁의 시간은 기념되고 또 복원되어야 한다는 윤리적 당위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 홍진훤 또한 저 투쟁 영상들을 기념하거나 복원하는 자가 아니라 디지털 글리치가 있는 그대로 첫 번째 축과 병치시키는 개입자의 자리에 머문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축이 있다. 두 개의 시간 사이에서, 증언과 자기- 표명 사이에서, 기념과 망각 사이에서, 복원과 삭제 사이에서 점멸하는 현재의 풍경들이 말이다. 종종 이 풍경들은 텅 비어 있거나, 사람이 있다 해도 개인으로서 드러나지는 않으며, 얼굴이 보이지 않는 동상들 주변을 맴돌 뿐이다.

이상 세 개의 축을 염두에 두고 작업하면서, 홍진훤은 인터뷰이들의 증언이 민주화 세대의 특권적 기억을 신화화하는 데 일조하지 않게끔 주의했다고 한다. 구체적으로는, 아카이브 영상과 풍경이 그들의 증언에 대한 비판적이고 저항적인 논평이 되게끔 함으로써 말이다. 그의 말이 허언이 아님은 작품을 보면 누구라도 감지할 수 있겠지만, 세 개의 축을 운용하는 그의 방식이 비선형적 관람을 허용하는 전시나 책자의 형태가 아닌 불가피하게 선형적 흐름을 따를 수밖에 없는 영상에서 실제로 얼마나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다큐멘터리적 영상에서는 인터뷰이의 이야기가 지나치게 우월한 위치를 점하는 경향이 있어서 아카이브 영상이나 풍경을 이와 동등한 수준에 두기가 대단히 어렵다. 아카이브 영상과 풍경이 인터뷰이의 말과 대립하는 힘을 품고 있을 때조차도 그러하다. 일단 말하는 이와 병치되고 나면 아카이브 영상은 ‘자료화면’이, 그리고 풍경은 ‘인서트’가 되어버리는 사례가 적지 않다. 대담 자리에서 홍진훤은 작업 도중 이러한 위험을 마주쳤을 때 느낀 공포와 당혹감을 솔직하게 토로하곤 했다. 다행히도 〈멜팅 아이스크림〉은 그런 위험에 빠져드는 것을 좀 아슬아슬하기는 하지만 절묘하게 피해 나간다. 나는 그가 구사하는 시청각적 배치의 방식, 사진작가이자 기획자로서의 경험을 통해 습득했음이 분명한 그 방식이 강력한 몽타주 방법론으로 전화되어 깊숙이 영화를 파고들 수도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다.

대담 자리에서 작가에게 물어볼까 말까 망설이다 결국 조심스레 접어둔 질문 하나. 이 작업을 하면서 혹시 현장에 대한 생각이 달라진 부분이 있습니까? 내가 아는 한 사진작가로서의 홍진훤은 자신의 작업이 현장 사진이라 불리는 것을 수긍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전적으로 부정하지도 않는 작가다. 그런 그의 사진은 어딘지 기묘한 자리에 있다는 느낌을 준다. 특히,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침몰 사고가 있고 나서 한 달쯤 후에 진도 팽목항을 찾아 거기서 본 새벽 바다를 찍은 사진은 한 번 보고 나면 좀처럼 잊히지 않는다. 대담 자리에서 나는 그에게 직접 현장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대신 이 사진을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나서 심미적 구성과 사회적 맥락 중 어느 한쪽에 고정되지 않은 채 줄곧 진동하는 그의 작업의 힘에 대해 말했다.

사실, 이 사진을 한참 보고 있노라면 일종의 무력감에 빠져들기도 한다. 어떤 사진이 다른 무언가와 계속해서 관계를 맺고 있지 않으면 엄청난 비극조차도 지극히 미적으로 추상화될 수 있다는 사실을 엄연히 느끼게 하는 탓이다. 바로 그러한 ‘관계’를 구성하는 다양한 전략들을 모색하는 것이 작가이자 기획자로서 홍진훤이 해 온 작업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그것은 이미지 내적으로는 현장감이 완전히 빠져나간 상태라 하더라도 사진이 사건적 장소를 계속해서 현재화할 수 있도록 특정한 담론적 배치 내에 사진을 두는 일이다. 그에게 있어 사진은 사건적 장소와 시공간적으로 직접적인 물리적 관계를 맺은 흔적을 담고 있다는 뜻에서 지표적(indexical)인 것이 아니다. 이와 관련해, 그는 안소현 큐레이터와 주고받은 서신을 엮은 『사진에 관한 대화』(현실문화연구, 2019)에 실린 한 편지에서 흥미로운 비유를 든다.

“인덱스는 무엇을 가리킨다고 말해버리기엔, 다시 말해 사진은 어떤 현실을 가리킨다고 말해버리기엔 저에겐 아직 껄끄러운 부분이 있어요. 그래서 저에게 인덱스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같은 거예요. 곧 날이 밝을 텐데 달을 가리키던 저 손가락은 어디를 향하게 될까 하는 걱정이 먼저 들어요. 이런 이상한 상황들을 또 다른 ‘물리적 절대성’이라고 말해볼 수 있을까요? 인덱싱되고 난 그 순간부터 지금의 인덱스는 지금의 현실과 물리적으로 연결될 수 ‘없다’는 물리적 절대성이요. ”

홍진훤이 ‘인덱스’라는 용어를 빌려 말하고 있는 사진의 특성은 사실 롤랑 바르트가 『밝은 방』에서 ‘지시적(déictique)’이라고 부른 것이다. 한자어로 지시란 손가락으로 가리켜(指) 보이는(示) 것을 뜻하는데, 흥미롭게도 바르트 또한 사진의 지시적 특성에 대해 논하면서 사진은 “어떤 마주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것이라고 언급한다. 지시적 기호는 ‘이’, ‘그’, ‘저’ 등의 지시대명사나 ‘당신 오른쪽’, ‘다음 해’ 같은 표현처럼 전적으로 상황 의존적이거나 맥락 의존적이어서 그 자체의 고유한 의미나 속성을 갖지 못한다.

현장 사진의 전문가들은 대개 사진의 지시적 특성이 최대한 드러나지 않게 감추면서 지표적 특성을 강화하려 노력한다. ‘지금 이곳’을 증언하려 드는 그들의 사진은 얼마간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때 그곳’을 대표하는 이름으로 언제까지나 보존되는 기념비가 되기를 갈망한다. 반면, 지표성이 희박하기 그지없는 홍진훤의 현장 사진은 종종 사진의 지시성을 극단으로까지 밀어붙인다. 이런 사진은 그것이 지시하는 바를 이미 알고 있었거나, 알고자 하거나, 어떻게든 알게 될 이들을 호명하는 이질적이고 우연적이며 유동적인 공동체를 활성화한다. 이합집산하기를 멈추지 않는 이런 공동체를 통해 거듭해서 현재화되지 않으면 이런 사진은 이내 추상화되거나 미학화될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포즈를 취한 손가락만 보이게 되는 식이다. 홍진훤 스스로는 ‘부재 증명’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이런 사진은 적절한 담론적 배치를 통해 공동체가 활성화되어 있는 한에서는 언제나 ‘지금 이곳’을 가리키게 된다. 이런 사진은 현장감 없는 현장의 웅변을 들려준다. 다만, 끝없이 다른 형태로 이합집산하는 저 공동체의 성원들이 모두 모여 다 함께 그 웅변에 귀 기울이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런 사진은 기념비적일 필요가 없다.

〈멜팅 아이스크림〉을 지탱하는 세 개의 축, 즉 증언과 자기-표명과 풍경은 영상이 현장과 관계하는 서로 다른 세 가지 방식을 암시하는 것처럼 비치기도 한다. 그런데 사진에서 영상으로 향하는 과정에서 홍진훤은 왜 이번에는 풍경만으로는 불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이질적이고 우연적이며 유동적인 공동체를 활성화하고자 할 때 사진의 경우에는 분명 외부에 두어도 좋다고 생각했던 담론적 배치가 영상의 경우에는 왜 내부로 들어오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물음은 끊이지 않는다. 하지만 〈멜팅 아이스크림〉이 정말 흥미로운 것은 무엇보다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우리를 인도하기 때문이다. 저 배치가 성공적일 경우, 현장은 과연 언제 어디서 어떻게 현재화되는 것일까? 다시, 간단히 말하자면 이런 질문이다. 영화적 현장이란 무엇입니까?

* 『보스토크(Vostok)』 vol.33 [영화의 장소들]

『보스토크(Vostok)』 vol.33 [영화의 장소들] 현장감 없는 현장의 웅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