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채찍은 어디로 향할 것인가?
Where will our whip go?
(2024)

공간 힘은 2024년 4월 16일 화요일부터 2024년 5월 4일 토요일까지 <2023 큐레토리얼 프로그램> 결과전시를 개최합니다. 공간 힘 ‘큐레토리얼 프로그램’은 지역의 큐레토리얼 활동을 활성화하고자 2020년부터 소수의 참여자를 선정, 참여자들이 첫 기획 전시를 실행하도록 지원해오고 있습니다. 2023년은 김도형, 정민주 두 명의 기획자가 참여하여, 약 1년 간 전시의 주제, 작가 및 작품 연구 등 전 과정을 고민한 결과로써 전시를 개최합니다.

전시명
우리의 채찍은 어디로 향할 것인가?

참여작가
송성진, 여상희, 이원호, 홍진훤

기획
정민주

내용
《우리의 채찍은 어디로 향할 것인가?》는 전국 각지에서 보도되고 있는 전세사기를 비판적으로 다루어봅니다. 전시는 금융자본주의의 발달과 화려한 도시개발에 대한 열망, 그 이면에 자리 잡은 부동산 문제를 다양한 시각 이미지로 분석합니다. 또한 이와 같은 문제를 우리가 어떤 태도와 시선을 가지고 바라보아야 하는지 질문하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재설정해 볼 것을 제안합니다.

전경 사진
홍진훤

전시 기간
2024년 4월 16일 (화) ~ 2024년 5월 4일 (토) (*매주 월요일 및 공휴일 휴관)

전시 장소
공간 힘 (부산 수영구 수미로50번가길 3, 2층)

관람 시간
11:00-19:00

주최 및 주관
공간 힘

후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시각예술창작산실 공간지원

《우리의 채찍은 어디로 향할 것인가?》

주식과 부동산이 고공행진 하던 시기에 인터넷상에서 주먹질하거나 채찍을 휘두르는 예수의 그림이 밈(meme)으로 퍼졌다. 밈에서 예수는 미국의 대표적인 투자은행인 JP모건과 골드만삭스에게 채찍과 주먹을 휘둘러 그들을 성전에서 몰아내며 동시대 자본주의의 단면을 비판했다. 이 밈은 ‘예수의 성전 정화’라는 성경의 이야기를 차용한 것으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예수는 유월절 기간에 부패한 시장이 되어버린 성전을 발견한다. 매매하는 자들은 제물을 가져오지 못한 이들을 대상으로 소와 양 그리고 비둘기를 팔았고, 돈을 바꿔주는 자들은 예루살렘 화폐를 보유하지 않은 이들에게 성전세로 쓰일 화폐를 높은 수수료로 환전해 주었다. 그러자 이러한 행각을 보고 분노한 예수는 이들을 꾸짖으며 쫓아낸다. 예수의 성전 정화는 정의를 상실하고 자신의 이익만을 좇는 제도를 만든 사람들과 그에 가담한 부패한 사람들을 비판하는 뜻으로 전해진다. 그렇다면 동시대 우리의 채찍은 어디로 향할까?

이번 전시의 기획은 인천 미추홀구 전세사기 사건(1), 빌라왕 사건(2) 등 전국 각지에서 보고되고 있는 전세사기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되었다. 먼저, 금융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누군가에게는 불로소득을 추구하기 용이한 환경이 제공되었다. 노동자들이 근로소득을 모아 더하기 빼기를 할 때, 화려한 수식으로 불로소득을 창출하는 이들이 점점 늘어났다. 주식, 채권, 부동산을 넘어 다양한 금융 파생상품, 선물, 옵션 그리고 사모펀드, 헤지펀드 등이 자본시장에서 세력을 넓혔다. 한편, 초기 투자금이 적게 발생하는 주식투자와 가상화폐가 인기라고 하지만 여전히 주거의 기능을 겸하며 사회적 계급을 나타내는 부동산이 최고의 투자 대상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하에 여러 정권이 교체되는 동안 맞물린 전세자금 대출 규제 완화와 전셋값 급등은 부동산 시장에 갭투자 열풍을 불어왔다. 그러자 엔데믹(3)과 금리 인상을 맞이하며 집값이 전셋값과 같아지거나 역전되는 ‘깡통전세’가 성행하기 시작했다. 이후, 무자본 갭투자가 유행하던 빌라와 오피스텔 등지에서 전세사기 피해가 터져 나왔다.

2023년, 우후죽순 발생한 전세사기로 많은 임차인이 죽었다. 그제야 사람들의 관심이 거대한 규모의 신종 사기로 쏠렸다. 이러한 전세사기 뒤에는 무엇이 존재할까? 금융자본주의와 도시개발, 메시아와 같은 재개발에 대한 열망, 끝없이 길어지는 아파트의 이름, 점점 더 화려해지는 아파트의 거대한 문주, 한 시대를 풍미하는 부의 상징이었으나 지금은 구식 동네의 표상인 양옥집, 빈틈없이 달린 재개발 허가 축하 현수막,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인한 강제 이주, 사람이 떠난 자리에 마지막으로 남은 길고양이, 현대인의 삶을 구원할 마지막 구원자로서의 집, 그리고 그 집을 가지거나 지키기 위한 사투를 벌이는 삶이 있었다. 정주적 공간으로서의 의미를 잃고 자본 증식의 수단으로
전락한 현대의 땅과 집은 손쉽게 범죄의 배경이 되었다.

한국 사회에서 메시아와 같은 투자의 대상은 부동산이다. 전세사기 범행은 본능적인 불로소득 추구의 욕망에 대하여 뒤돌아보게 한다. 법의 허점을 이용해 범죄를 저지른 이들도 보였지만, ‘영끌’과 ‘빚투’를 조장하는 세상도 함께 보였다. 이러한 배경은 금융자본주의 속에서 오랫동안 인간의 탐욕이 축적된 결과였다. 부의 세습이 당연시되고, 계층이동이 불가능하며, 구별짓기가 필수적인 지금의 세상에서 보통 사람으로 사는 기준은 점점 더 팍팍해진다. 동시대에는 끊임없이 자본을 중심으로 한 이율배반적인 일들이 발생한다. 하지만 자본주의와 자유시장 경제체제 아래에서는 모든 것은 자연스럽다. 윤리와 도덕에 반하는 행위들이 계속해서 생겨난다. 점점 보통의 기준이 모호해진다. 근로소득이 불로소득을 따라잡을 수 없는 지금의 세상에서 사람들은 어떠한 태도와 시선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까? 그리고 한국의 자본 증식 문법을 작가들은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전시는 한국의 땅과 집에 대하여 오랜 시간 고찰한 작가들의 시선을 빌려 과거를 반추하고, 앞으로의 삶의 방향을 재고해 보길 요청한다.

홍진훤은 <임시풍경>, <워터-폴> 시리즈에서 한국 사회의 개발 문법을 사진으로 제시한다. 개발은 모든 것을 임시적으로 만들며 이 풍경들은 과거의 부재를 증명함과 동시에 스스로도 부재할 운명임을 증명하는 수단이라고 작가는 설명한다. 보는 이는 <임시풍경>의 자연 풍경을 가로지르는 인공적인 기표들로부터 알 수 없는 부재감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이번 전시에서는 <임시풍경>의 연장선상에 있는 <워터-폴> 시리즈가 함께 공개된다. 압축적 근대화에 따른 도시개발과 공격적인 국가적 단위의 토건사업이 지나간 흔적은 역설적이게도 인간은 부재하고 자연만 비대하게 팽창한 장면으로 나타난다. 작가의 풍경 사진은 우리 사회 속에 깊게 내포된 우상향의 믿음과 그로 인해 밀려나는 존재들을 암시한다.

여상희는 <사라진 방>에서 잊혀진 대상을 관찰하여 재조명하고 이들이 다시금 기능할 수 있게끔 목표하는 주제의식을 보여준다. <사라진 방>은 작가가 재개발 구역에서 동물 구조 활동 중 포착한 현장의 모습과 해당 지역에서 만난 다양한 사람들과의 기억을 재구성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언젠가는 가장 좋은 자리에서 정성스레 모셔졌을 누군가의 성모상과 예수 성물, 그리고 공간의 조각들이 작가의 규칙으로 재정립된다. 공간의 중앙부에 배치된 수석들은 재개발 지역에서 수집한 수석 좌대와 작가의 신문지 돌을 결합한 것으로, 가치가 급변하여 파괴되고 소실될 위기에 처한 존재들을 아우른다. 그리고 돌덩이에 가치를 매겨 감상하고 거래하는 취미인 수석은 한국 사회의 부동산과 비트코인과 같은 ‘메시아’에 대한 우상향의 믿음을 연상시킨다. <돌을 던지라>는 전시의 말미에 등장하는 작품으로 신문 부동산 광고와 사회참여의 메시지를 함의하고 있는 작가의 신문지 짱돌을 함께 배치한 작품이다. 이는 한편으로는 무의미해 보일 수도 있는 작가의 행위가 보는 이의 사회참여를 유도하기 위한 최소한의 예술 실천이었음을 설명한다. 마침내 관객은 작품을 통해 골리앗에게 돌을 던지는 다윗의 마음으로 한국 사회의 개발 문법을 다시 보게 된다.

이원호는 <부(浮)부동산>에서 집이 가지는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역할에 대해 주목한다. 작품은 작가가 일본과 한국의 노숙자들이 거주하는 장소를 찾아다니면서 그들이 직접 지은 ‘집’에 사용된 박스의 가격을 물어보고 흥정하여 구입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노숙자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박스집에 가치를 매기고 이것들을 판매하는 과정은 오늘날 우리가 부동산을 사고파는 모습과 닮아 있다. 하지만 이들이 집에 매기는 가치는 한국 사회에서 재산을 증식하기 위한 수단인 ‘집’이 가지고 있는 가치와는 분명한 차이점을 보인다. 이러한 과정들은 믿음에 의해 가치가 비대해진 동시대의 ‘집’을 되돌아보게 한다. 하지만 정주적 공간으로서의 ‘집’의 본래적 의미를 되찾기 위한 작가의 실천 속에서도
우상향의 그래프는 여전히 등장하며 이는 인간의 본능적인 불로소득 추구의 욕망을 연상시킨다.

송성진은 <1평 조차(1坪 潮差)>에서 밀려난 것들에 대한 작가의 시선을 공유한다. 작가는 독일에서 난민 문제를 처음 접하고 난 후에 방글라데시 로힝야 난민촌에서 생존을 위해 투쟁적인 삶을 이어 나가는 이들의 삶을 목도하게 된다. 다양한 이유로 밀려난 존재가 된 그들의 삶은 대단히 임시적이고 불안하다. 작가는 이러한 로힝야족의 임시적인 거주 양식을 차용하여 갯벌에 1평의 집을 짓는다. 조수나 기상 상황에 따라 떠내려가고 넘어지기를 반복하는 한 평 집을 두 달 동안 존속하는 작가의 수행적인 실천은 외압과 권위에 의해 존립이 결정되는 밀려나는 이들의 불안한 삶을 은유한다. 한국의 전통적 도량 단위인 1평(3.3㎡)조차 쉬이 가질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는 작품은 조사 ‘조차’가 아닌 밀물과 썰물 때의 수위 차를 뜻하는 ‘조차(潮差)’로 명명되어 집을 지키기 위해 분투하는 작가의 실천을 강하게 전달한다.

전시에 등장하는 작품들은 2010년대 초반부터 현재까지 다양한 시점을 담고 있다. 그리고 관객은 시차가 존재하는 작품들의 의미가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추첨일이 지난 뒤 휴지 조각이 되어버린 복권 용지는 구겨져 버려진다. 반면, ‘존버’(4)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낼 정도의 견고한 믿음 하에 언젠가 추첨일이 도래할 땅과 집은 마치 자린고비의 굴비처럼 정신 속 어딘가에 안전하게 매달려 우리를 지켜본다.

전시는 견고한 우상향의 믿음이 만들어 낸 한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작가의 시선으로 경유하며 당연한 것이 아닌 세상의 당연한 것들을 살펴보고 과연 우리의 채찍이 어디로 향해야 할 것인지 적극적으로 고찰해 보길 바란다.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어느 방향으로 채찍을 휘두르고, 돌을 던져야 할까? 이 전시가 애써 무시하고 싶은 세상의 기이하고 신묘한 틈을 다시 보게 만드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

(글: 정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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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천 미추홀구 일대에서 건축업자인 건물주 및 부동산 공인중개사 등이 조직적으로 공모한 전세사기 범행
(2) 임대인 한명이 깡통전세 수백채를 이용하여 무자본 갭투자·동시진행 수법으로 차액을 남긴 전세사기 범행
(3) 감염병의 풍토화
(4) 비속어인 ‘존*’와 '버티다’의 합성어로 힘든 과정을 거치는 중이거나 참는 상황에서 사용하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