줌 백 카메라
Zoom Back Camera
(2019)

전시기간: 2019.9.6-9.25
전시장소: SeMA 벙커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2-11 지하)
참여작가: 김희욱, 임영주, 차지량, 홍진훤
전시기획: 박수지
코디네이터: 신은진, 김지연
그래픽 디자인: 일상의실천
공간 디자인: 김용현 (스튜디오 에어)
트레일러: 복코
번역: 콜린 모엣
그래픽 시공: (주)새로움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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줌 백 카메라 Zoom Back Camera
박수지

당신은 믿기도 전에 믿고 있다. 왜냐하면 익숙함이야말로 나의 신앙이며 유행이야말로 나의 기준이고 예속이야말로 나의 지침이기 때문이다. 진리는 부도덕하고 의심은 사치스러우며 반성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속도의 빠르기에 비례해 시간은 사라진다. 최대한 시간을 없애버리기 위해 당신은 제시된 속도보다 늘 더 빠르게 모든 것을 스쳐 간다. 시간이 모든 것을 괴롭게 만들기 때문에 이를 가장 빠르게 통과할 방법은 시간 안에 있는 나를 지워버리는 일이다. 이 방법이 가장 확실하다. 이 방법이 가장 쉽다. 그래도 더 빨리 이 상태에 도달하고 싶은 이들은 믿음의 촉매를 들이킨다.초점 없이 모든 것을 보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한 이들의안구는 불안정하게 움직인다. 촉매가 제대로 작용하고있다는 뜻이다. 약효가 심화될수록 내용은 소멸한다.모순적이게도 내용이 소멸할수록 진정성을 요구한다. 그러나진정성에 대한 요구, 정확히 거기까지가 믿음의 촉매가약속한 세계의 끝이다. 어쨌든 요구는 기각된다. 애초에기각을 전제로 발생한 요구이기 때문에 진실에 대해서라면사실상 아무런 의지가 없다고 봐야 한다. 어떤 간증들,욕망의 표면을 건드리는 이 간증에 의탁하는 믿음은 또 다른누군가를 언제든 합류시킬 준비가 되어있다. 구루는 더 이상이름을 가진 하나의 인간이 아니다.

포스트-코기토 시대에 ‘의심하는 나’는 사라졌다. 그래서 사람들이 사라진다. 사람들이 거리에 모이고, 함께 외치고, 서로를 향해 더 강렬한 공감을 선사하고, 비통함을 드러내었기 때문에 칭찬 받는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람들이 사라진다. 어쩌면 그때 더 많은 이들이 한꺼번에 사라진다. 이제 모두 서로가 되었다. 중립은 ‘준비된 순응, 정치적인 중립성, 회색지대로의 전락, 기존 조건에 잘 순치된 무관심’을 의미하지 않는다. (멜리사 그레그·그레고리 시그워스 편저, 정동이론 , 최성희·김지영·박혜정 옮김, 갈무리, 2015.) ‘의심하는 나’는 몸을 가졌기 때문에 감각하고 정동된다. 그런 ‘나’가 사라졌다면 이것은 무감한 상태, 무관심에 안착한 상태, 즉 죽음의 상태와 동일하다. ‘무엇’에 동요되는지보다 ‘어떻게’ 동요되는지가 중요하다. 동요된 상태는 불가해한 이분법과 만연한 모순을 피해 끊임없이 탈주하고 변화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아무것도 약속할 수 없다. 어쩌면 확답 없는 낙관만이 정동이 줄 수 있는 가장 큰 약속이다. 그러나 낙관이 가능해지는 일은 대단한 능력을 필요로 한다. 거름망 없는 눈과 귀가 될 수 있는 입과 코가 될 수 있는 손이 필요하다. 즉, 지극히 개인적인 몸이 필요하다. 그러나 바로 이 초개인적인 정동과 정념의 바탕이야말로 실제를 버티게 한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사회의 문화 감수성이 전환기를 맞이한 이후에는 어김없이 구루의 등장이 함께했다. 동서양을 막론한 일련의 구루들은 그 사회가 어떠한 가치관을 갖고있든 진리, 사랑, 평화 등 보다 근본적인 사고체계에 변화를 제시해왔다. 구루가 제시하는 공동체와 그 공동체가 형성되고 작동되는 방식은 한 사회의 특정 시기의 욕망을 반영한다. 이러한 공동체는 사람들이 무엇에 움직이는지를 보여주기보다 어떻게 동요되는지, 어떻게 실천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구루와 함께 태동해 구루로 인해 무너지는 모더니티는 그 자체로 동시대 리얼리즘의 메타포가 된다. 이전에는 구루의 존재가 큰 스승으로 여겨질만한 한 명의 인간을 중심으로 이해되었다. 우리가 구루에 대해 불편해 하는 이유는 구루가 제시하는 시스템이 천편일률의 욕망 구조를 흔들어 놓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대의 구루는 마치 빅브라더처럼 그 실체를 발견하기 어렵다. 오히려 구루는 그 출처를 알 수 없이 자가 증식하고 있는 모양새를 갖고 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이 자가증식 하는 구루는 개인이 중시되고 그 자유가보장되는 것과 동시에 정치적 올바름과 트렌드라는 강력한투명 장벽 안에서만 작동되기 때문에 철저한 타자 의존적노출증으로 표출된다. 인플루언서가 되는 것이 장래희망인 세대의 콘텐츠는 욕망구조를 다양화시키는 방식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마치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듯 성찰 없는 세계를 겉잡을 수 없는 속도로 관통한다.

*Zoom Back Camera
이번 전시의 타이틀 ‘줌 백 카메라’는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 감독의 1973년 작 <홀리 마운틴 Holy Mountain>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영화는 세계의 역사가 작동하는 방식, 그 안의 진리를 추구하는 행위와 진리를 추구하는 척하는 양태, 인간의 욕망과 사회의 구조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결과적으로는 모두를 현실로 이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 중 이름도 대사도 없는 수많은 군중은 늘 휩쓸리는 일에 저항하지 못하거나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예속시킨다. 자의 없는 동요, 혹은 자의로 착각된 동요를 통해 삶을 구축해온 그 많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연금술사이자 구루인 존재가 영화의 말미에 언급하는 ‘Zoom back camera!’는 프레임 안의 화각을 넓히며 뒤로 물러나는 행위를 뜻한다. 프레임은 구루와 추종자들을 지나 그들을 촬영하고 있던 카메라와 붐 마이크, 주변의 스텝들까지 비춘다. 이것은 단지 영화이며 현실을 보기를, 이것은 단지 전시이며 현실을 감각하기를 권유한다. 예측하지 못했던 상태를 마주하며 물음표를 생각하는 순간 지극히 개인적인 동요의 정서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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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진훤 작가에게, 홍진훤 작가의 정직함에 대해

누군가와 같은 공간과 같은 시간에 머무는 것이 확실하다고 여겨질 때, 세계는 나 이외의 타인과 함께 하는 곳이라는 대수롭지 않은 사실이 분명한 진실로 전해진다. 그러나 한 가지 곤란함은 같은 장소에 있다고 해서 같은 시간에 머무는 것이 아니며, 같은 식탁을 공유한다고 해서 같이 있다고 단정 지을 수 없다는 점이다. 곧장 나의 영토를 이곳이 아닌 다른 세계로 옮겨버릴 수 있는 지금의 단면들은 수시로 목격된다. 홍진훤 작가에게 무언가에 동요되는 것의 강력한 힘과 구루 모티브를 전했을 때 그는 이내 ‘알고리즘’을 소환했다. 그와의 대화는 마켓컬리의 소비패턴 분석 방식부터 브이로그까지, 블록체인부터 우주전쟁까지를 넘나들었다. 그는 근현대의 역사적 흐름을 반추하며 우리가 늘상 배반당해왔던 ‘믿어 의심치 않는 것들’에 대해 언급했다. 더불어 이 배반으로 비롯된 붕괴의 역사가 만든 목격자들과, 실시간의 목격이 담보하는 숨어있는 동요를 다소간 차갑게 풀어냈다. 그는 속도가 가속화되는 것이 아니라 속도의 순서가 뒤바뀌고 있다는 점, 개인의 의지가 절대적으로 작동한다고 여겨지게 할 뿐 의지의 작동 자체를 불가능 하게 하는 알고리즘 환경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어쩌면 홍진훤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다시 실시간의 목격자를 만드는 동시에 목격의 상황을 만들어야만 하는 일종의 한계에 내심 안타까워했을지도 모른다. 시선권력을 재배치시키려는 시도는 다른 시선의 태도와 방향을 제공해야 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홍진훤 작가는 지금의 알고리즘이 지향하는 욕망을 역이용하는 것이 일종의 돌파구가 될 수 있다며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희망적인 멘트를 전해주기도 했지만, 어쩌면 이 알고리즘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이미 글러버린 상황의 지속인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