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 복제 시대의 사진
송수정
(2018)

사건 복제 시대의 사진
송수정(국립현대미술관 연구기획출판팀장)

사진기자로 활동하던 홍진훤은 2009년 사진비평상을 받으며 작가로 호명되었다. ‘나르시스의 자학’이라는 꽤 수사적인 제목과 달리 수상작은 용산 재개발에 관한 작업이었다. 그해 1월 20일 새벽 용산 남일당 건물 망루에서는 철거민 다섯 명과 특공대원 한 명이 공권력의 강제 진압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다. 당시 그는 현장에 있었다. 저널리즘에서 사실 보도를 가능케 하는 사건 발생지를 일컫는 ‘현장’은 사진기자나 다큐멘터리 사진가에게도 은어처럼 익숙한 표현이다. 작업 제목으로 미뤄, 현장사진가로서 그는 폭력적 죽음 앞에서조차 쓸모가 불투명한 자신의 사진 행위를 나르시시즘적 혹은 관음적 시선쯤으로 자학한 듯하다.

그 자학의 결과물에 대해 심사위원들은 “하늘을 향해 치켜든 주먹과 함성 없이 (중략) 현대 사회의 제도와 권력에서 오는 박탈감을 세련된 사진어법으로 옮겼다.”고 평했다. 이 사진어법은 그의 감각에서 비롯되었으나 동시에 객관적 사실 전달의 불가능성을 인지한 홍진훤이 현장에서 취할 수 밖에 없는 솔직한 방법론이기도 했다. 그 참혹함을 카메라의 눈이 미처 다 잡아낼 수 없는 현장도 있고, 분명 참혹함이 지나갔지만 잡아낼 만한 그 무엇도 남지 않은 현장도 있다. 이 대목에서 사진의 지시성은 늘 실패하고 만다.

현장과 풍경, 곳에서 것으로

남일당 사건 이후 홍진훤은 서울의 개발 현장들을 추가로 기록했는데, 사진의 정보성을 배제하려는 그의 시도는 같은 작업 안에서도 해를 거듭할수록 훨씬 강화되어 간다. 처음에는 창으로 들어오는 빛에 의지해 철거가 임박한 건물 내부의 그로테스크함을 드러내는 식이더니 점차 시간이 지나서는 공사장의 가람막을 조형적으로 보여주거나 일상에서 발견되는 인공의 풍경에 주목했다. 주로 해가 없는 날 촬영함으로써 빛 또한 더욱 흐릿하게 변해간다. 연작이라 하기엔 대상과 형식의 진폭이 있는, 본인의 스타일을 찾아가기 위해 필요했을 이 과정을 거쳐 2013년 스페이스99에서 첫 개인전으로 소개했을 때, 전시제목은 <임시풍경>이었다. 자본의 횡포와 압축 성장으로 인한 개발 강박이 그 누구도 정박할 수 없는 가변적 풍경만을 낳는다는 명제를 두른 이 전시는 사람과 사건이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제목을 통해 작가의 의도를 유추한다면, 남일당 사건이 모태가 된 같은 연작임에도 불구하고 여기서는 나르시스트로서의 사진가 대신 풍경이 목격자의 자리를 차지한다. 기록하되 사건에 개입할 수 없는 사진가의 무기력은 사건의 배경이나 대상이 될 뿐 주체가 될 수 없는 풍경의 운명과도 닮았다.

그러나 풍경의 의미를 사건이 일어난 스폿(spot)으로서의 현장이 아니라 지켜 내야만 하는 생계의 터전이자 땅으로 확장한다면, 이때의 풍경은 단순한 목격자가 아니라 폭력적 시간과의 싸움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능동적 주체로 거듭난다. 홍진훤은 풍경의 이런 속성을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곳’이 아니라 역사 그 자체로 퇴적되어 생존한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풍경은 사진가보다 역사적 사건 앞에서 주체적이며, 현장의 사건보다도 훨씬 긴 생명력을 갖는다. 홍진훤이 여전히 현장을 드나들면서도 자신을 풍경 사진가라고 불렀을 때, 그것은 단순히 사건의 서사를 배제한 사진을 찍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풍경을 통해 그 서사의 뿌리까지 건드려 보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을 것이다. 현장 사진가로서 그는 현실 세계에 대한 기록을 멈추지 않지만, 동시에 풍경 사진가로서 그는 시간적으로나 지리적으로 그 현장에서 점점 멀리 도망쳐 간다. 설령 현장에서 찍은 사진이라 할지라도 그가 포착한 장면, 주목하는 대상들은 상황을 설명하는 직접적인 인과 관계를 만들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최근 아트 스페이스 풀에서 열린 <랜덤 포레스트> 전시를 앞두고 기획자 안소현이 홍진훤과 나눈 ‘사진에 관한 대화’에서 작가는 “이 풍경과 저 사실 사이의 아무 상관없어 보이”는 이 간극을 ‘낙차’라고 불렀다.

사진이나 전시가 지니는 표면적 의미를 모호하고 불편하게 함으로써 더 많은 시각적 질문을 불러오려는 그의 낙차 전략은 <임시풍경> 직후의 <붉은, 초록>에서 명확해진다. 4·3의 상처를 담은 제주와 이 섬 못지않게 역사적 비극을 품은 오키나와의 숲, 원자력 발전소의 붕괴로 폐허가 된 후쿠시마의 풍경을 함께 보여 준다. 그가 이 촬영을 할 때 해군기지 건설을 위해 제주 강정의 구럼비마을이 파괴되고, 밀양에서는 부산의 고리핵발전소로부터 이어지는 송전탑 건설 반대 싸움이 한창이었다. 당시 그는 강정과 밀양 두 곳에 다 있었지만, <붉은, 초록>에서는 이 동선이 생략되었다. 대신 강정의 과거로서의 오키나와가, 밀양의 미래로서의 후쿠시마가 보일 뿐이다.

거센 항의에도 불구하고 이제 강정에 들어선 해군기지에는 ‘제주민군복합형관광미항’이라는 기묘한 이름이 붙었는데, 공격과 방어를 전제로 하는 군사 시설에 아름다움이나 관광 같은 온갖 욕망의 수식을 가져다 붙인 것 자체도 폭력적이다. 아름다운 구럼비든, 투쟁의 한 장면이든, 현재의 거대한 해군기지 그 자체든, 그 어떤 사진도 이런 비현실적인 이름 앞에서는 의미의 연결고리를 만들어 내지 못하고 허망하게 미끄러진다. 그러므로 현실에서 그의 사진은 폭력에 맞서지 못한 채 또다시 패배한 셈이고, 그럴수록 그는 더 큰 낙차를 위해 더 멀리 벗어나기를 반복한다.

“수수만년 세월이 만든 바닷가의 아름다운 바위를 한 시절의 이득을 위해 깨부수는 것이 폭력임은 말할 것도 없지만, 고속도로를 160킬로미터의 속도로 달리는 것도 폭력이고, 세상에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살아가는 것도 따지고 보면 폭력이다”라는 황현산의 말에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그는 다만 사진을 아무 일로 삼을 뿐이다.

그리하여 <쓰기금지모드>에서는 평택에 들어선 기이한 뉴타운을 통해 평택 대추리의 미군기지 건설을, <마지막 밤(들)>에서는 속도가 잠시 멈추는 고속도로 휴게소의 불빛을 통해 세월호에서 보냈을 조난 신호를 에둘러 은유한다. <마지막 밤(들)>에서 그가 하룻밤이 아니라 밤(들)을 기념하는 까닭은 멈춤과 치유와 모호함과 저항과 두려움의 상징인 밤들 또한 무한히 반복되어 온 시간이자 풍경으로서 ‘것’이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그가 풍경과 시간을 강조할수록 마치 유령처럼 거기에 등장했어야 마땅한 존재들의 부재함 또한 또렷해진다.

조난 신호를 향한 침묵의 종착점을 찾듯 홍진훤이 세월호에 탄 단원고 학생들의
수학여행 코스를 기록한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에서 이 부재감은 훨씬 커진다. 홍진훤이 평상시에 꺼내 놓은 말과 사진 밖 실천으로 짐작하건데, 세월호는 그에게도 무게가 다른 비극이었다. 그때는 숱한 사진가가 재현이 불가능한 재난 앞에서 사진의 역할을 의심했다. 대상 종속적인 사진이 부재를 증명할 길은 없기에 진도의 쓸쓸한 밤바다와 화려한 유도탄에 비춰진 선체와 노란 종이배의 시진들이 반복적으로 생산되었다. 한 장의 사진이 복제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건이 복제되고 있었지만, 정작 이 사건의 실체를 보여 줄 증거로서의 사진은 존재하지 않았다.

사실 홍진훤이 패배하면서도 저항하려 하는 일상의 폭력 가운데 사진만큼 교묘하고 거대한 수단도 드물다. 사진의 역사는 더 빨리 더 정확히 더 멀리 보려는 속도 싸움의 결과물이며, 방어할 틈을 주지 않고 대상을 낚아채는 가장 일방적인 공격방식이기도 하다. 이제는 그것이 무작위로 유통되는 방식 또한 폭력성을 증폭한다. 그의 앵글이 스펙터클함에서 점점 더 멀어지는 것은 폭력적 상황을 만들어 내는 비가시적 권력만큼 스펙터클한 것은 없기 때문이며, 동시에 사진 자체가 갖는 폭력적 작동 방식에 대한 반작용 때문이기도 하다. 때로 사진과 권력은 한 몸처럼 움직이기도 한다. 그는 기록도 고발도 아닌 밋밋하고 부질없는 이미지들을 통해 이 작동에 균열을 내 보려고 한다. 밋밋하고 무심한 것들이야말로 일상과 더 가깝고, 그래야만 적게 동요하면서 훨씬 집요하고 유연하게 오래 견딜 수 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에서 세월호의 학생들이 도달했어야 할 제주의 장소들은 고속도로 휴게소의 밤 시간들만큼이나 조용하고 차분하다. 촬영의 배경으로 삼은 날씨는 이전의 연작보다 훨씬 더 흐리고 무거워졌다. 이 침묵과 함께 <임시풍경> 속 어느 장면을 보는 듯 아이들이 가려던 테마파크는 불안하며, 한림공원 식물원에 핀 붉은 꽃은 <붉은, 초록> 속 오키나와 숲의 이국적이면서도 익숙한 풍경으로 하이퍼링크를 타듯 연동된다.

낙차로서의 데이터 알고리즘

홍진훤이 제시하는 이미지가 표면의 대상을 넘어 다른 장면을 연상시키는 일은 어떻게 가능해지는 것일까. 대개는 한 사회가 체득한 공통의 학습 안에서 이미지를 해석하기 때문이라거나, 아니면 정반대로 지극히 주관적인 저마다의 경험이나 상처에 반응하는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사진에 관한 대화’에서 안소현과 홍진훤은 사진은 이러한 기호적 속성과 현상학적 속성의 양극단을 애써 경계하며 사진에 대한 태도를 좁혀나간다. 어쩌면 <랜덤 포레스트> 전시는 이 질문의 답을 찾는 과정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 전시 제목은 기획자의 글에 따르면, 기계학습(machine learning)에서 제약을 두지 않고 양적 증가와 우연을 통해 소통의 효과를 높이는 방법을 가리킨다. 즉 알고리즘에서 무작위로 트리(tree)의 종류를 다양화하고 그 양을 늘려 정합성을 갖는 것을 나무가 모여 숲을 이루는 것에 비유하여 붙인 이름이다.

홍진훤이 지금껏 이미지의 지시성으로부터 멀어짐으로써, 사건에 대한 인지의 시간을 지연시킴으로써 사진과 정보 수집 속도와의 상관관계에 저항해 왔다면, <랜덤 포레스트>에 이르러서는 사진을 하나의 랜덤한 데이터로 설정해 버림으로써 사진에 끊임없이 달라붙는 정보성에 대한 강박 자체를 제거해 버린다. 정보가 제거되면 정보값에 따라 달라붙는 윤리적 강박에서도 자유로워진다. 이 윤리적 프레임에서 벗어나는 순간 사진의 해석은 훨씨 자유로워진다. 그는 연작이라는 형식으로 묶어 둔 사진들마저 개별 이미지로 해체하며, 하드디스크에 저장해 둔 사진까지 꺼내 와 낱낱의 데이터로 만들고 재조합하기를 시도한다. 그 알고리즘은 카드놀이와 비슷한데 어떤 이미지는 색감과 조형감의 유사성을 통해 병치하고, 어떤 이미지는 전혀 알 수 없는 모호함을 극대화하는 방식이다. 이것들은 전시장에서 서로 교란하고 충돌하면서도 마침내 영화 <아바타>의 땅 밑 세계처럼 서로가 접속해 유기적 알레고리를 만들어 낸다. 물론 이 접속의 과정들은 때로 지지직거리는 전파처럼 매끄럽지 않고, 오랜 기억을 더듬듯 뜨문뜨문 시간이 걸리기도 하며, 전혀 엉뚱한 의미를 형성해 내기도 한다.

이 전시에서 설정한 데이터의 디폴트값이 제로라고는 할 수 없다. 크고 작은 세 개의 방은 저마다 전시에 대한 단서들을 다른 수위로 제시하고, 무작위로 선정한듯한 디지털 데이터들은 구도에 예민한 작가가 노련한 셀렉팅 과정을 통해 선별해 일관된 형식미를 구축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형적이지 않은 전시는 관람객 스스로 새로운 해석의 알고리즘을 만들어 내는 가능성을 열어 둔다. <랜덤 포레스트>에서 홍진훤이 사진을 다루는 방식과 전시가 사진을 보여주는 방식은 시간과 사건을 재구성하고 이미지들 간의 의미를 확장한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큐레이팅 과정을 구현한다. 홍진훤을 이미지 채집가보다는 큐레이터로서의 사진가라고 부르고 싶은 이유이기도 하다.

* 『미술세계』 2018년 9월호 제72권(통권 제406호)

『미술세계』 2018년 9월호 제72권(통권 제406호)